16 3
Paragraph 16.3.1
인도 현대 불교의 네 가지 흐름
인도 땅이 하도 넓다 보니까 부처님 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불교가 그대로 이어져서 신앙되는 지역도 있다고 합디다. 동북부 조그마한 지역인데,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이천오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불교를 믿어오고 있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신앙해온 것이니까 불교의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뚜렷한 모습이라기보다는 그저 신앙으로서 힌두교에 흡수당하지 않고 있다는 정도랍니다.
그 예 말고는 ‘인도 불교’라고 할 만한 움직임은 최근에야 태동한 것입니다. 근래 인도 불교의 흐름은 네 가닥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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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2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소위 불가촉천민들에 의한 불교입니다. 불가촉천민이란 카스트에도 들지 못하는 천한 사람들입니다. 손대면 부정 타고 함께 천해진다고 ‘불가촉不可觸the untouchable’이라 합니다. 그렇게 사람 아닌 사람으로 취급받는 불가촉천민의 수가 상당한데, 그 사람들이 모여 믿는 ‘신 불교New Buddhism’라는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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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3
그 불가촉천민 중에 암베드카르Ambedkar라는 지도자가 한 분 나왔습니다. 영국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후 인도 정부가 구성될 때 초대 법무장관을 지냈던 그가 불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교육도 많이 받고 영향력이 큰 그가 불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수많은 불가촉천민들이 그를 따라서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그걸 인도에서는 신 불교라고 부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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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4
불가촉천민들은 주로 뭄바이 근처에 많이 살고, 사원도 있다고 합니다. 불가촉천민들은 스스로 신 불교인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인도에서 ‘불교인’으로 잡히는 통계상 숫자가 주로 그들이라고 합니다. 불가촉천민들에게 있어서 사실상 믿음의 주된 대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기보다 바로 암베드카르입니다. 추종자들은 그를 ‘보살’이라고 부르면서 완전히 신격화했습니다. 인도의 다른 훌륭한 사람들처럼 암베드카르 역시 신의 화현이 되었고, 그래서 인도의 신 불교에서 부처님은 희미해지고 암베드카르가 신앙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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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5
인도 불교의 다른 한 가닥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티베트 라마들과 티베트 난민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데 의외로 수가 많습니다.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이라든가 붓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 가보니 라마 스님들이 많이 모여 있고, 마하보디 사원 대탑 뒤에도 라마 스님들이 시간 되면 독경도 하고, 평상시에는 따로따로 염불도 하고 있었습니다. 네팔에도 라마 스님들이 난민촌을 형성하고 절을 아주 잘 가꾸어놓고 있었습니다. 티베트 절이 깨끗한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난민들에 의한 ‘티베트 불교’가 하나의 흐름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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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6
또 다른 불교 움직임 중 하나가 재가자가 이끄는 ‘처사 불교’입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상당히 활기차게 전개되고 있는데, 고엥카 센터를 중심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에 접근하겠다는 처사 불교가 하나의 신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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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7
고엥카Goenka라는 분이 미얀마에 가서 우 바 킨U Ba Khin이라는 한 스승을 만났는데, 두 분 모두 재가처사들입니다. 거기서 위빳사나 공부를 전수받아 나름대로 한 소식을 얻고는 인도로 돌아와서 불교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고엥카 센터는 뭄바이 근처에 본부를 두고 여러 군데 지부를 두면서 상당히 의욕적으로 활동하는데, 주로 위빳사나를 가르친다는 게 특색입니다. 특히 외국인들이 많이 오고 인도인들도 열심히 배운다고 합니다. 요컨대 수행 중심의 처사 불교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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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8
한편으로 고엥카는 역경사업소를 차리고 인도의 빠알리어 학자들을 초빙해서 최상의 대접을 하면서 역경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나온 책을 보니까 미얀마 6차 결집에서 나온 최신 빠알리 경을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할 때 쓰는 데바나가리Devanāgarī 문자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 작업이 끝나면 힌디어로 그리고 영어로 번역을 하겠다는 장기적 포부를 가지고 있습디다. 번역 작업을 하는 학자들은 빠알리어 학과 교수들로 전부 힌두교도이기 때문에 불교를 단지 학문적으로만 대할 뿐이었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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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9
한편 처사 불교의 한계라면 거기에는 승가僧伽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평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인도에서 보니 승가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든지 토착인의 승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불법佛法이 세워질 수 없다.’ 이것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의 말입니다.1 승가 없는 불교란 사실상 본격적인 불교라 할 수 없습니다. 불·법·승 삼보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승가가 없으면 불교가 반듯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이 말을 생각해 볼 때, 처사 불교 지도자가 정말 진정한 자세로 불교를 그 땅에 전하려 한다면, 그리고 불교 정신을 조금이라도 살려내려 한다면, 오히려 승가를 세우고 보호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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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0
승가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던 바이기에 그분에게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이 ‘아시다시피 인도에 승가가 있을 여건이 됩니까. 무슨 신도가 있어서 승가 뒷바라지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이렇게라도 해서 승가를 뒷바라지할 신도 층을 만드는 단계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엥카의 말대로 그렇게 승가를 추앙하고 삼보를 받들 자세라 해도 인도라는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가자 불교운동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좀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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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1
삼보를 구족하지 않을 때는 누구든 신격화의 늪에 빠질 위험성이 크지요. 그리고 소위 위빳사나를 한다면서 거기에 치우치게 되면 과연 팔정도의 바른 마음챙김, 사띠sati가 있는지 의심스럽게 됩니다. 사실 ‘위빳사나만 하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승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수행만 잘 하면 되지’ 하는 분위기가 은연중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걸 계기로 삼보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는데, 인도라는 불교의 황무지에 가서 보니까 역시 승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실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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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2
그리고 마지막 한 가닥은 아주 희귀한 경우입니다. 인도 출신 스님이 승가를 지키며 불교운동을 하는 흐름입니다. 방갈로르에 붓다락키따 스님이 창설한 ‘마하보디협회Maha Bodhi Society’가 그것입니다. 여러분, 붓다락키따라는 이름, 처음 듣지는 않을 겁니다. 〈고요한소리〉에서 나온 《자비관》이 붓다락키따 스님의 저술입니다.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에서는 붓다락키따 스님의 《법구경》 번역을 제일로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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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3
이 스님은 바라문 계급인데 일찍이 미얀마에서 출가하여 공부를 계속하면서 빠알리Pāli 경전의 미얀마 6차 결집에도 참여할 만큼 빠알리어에 정통한 스님입니다. 특히 이 스님은 인도 바라문 출신이면서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도에서 불교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스님들도 있으나 그 수는 미미합니다. 그렇지만 인도 불교의 상황에서 볼 때 마하보디협회는 불교적 정통성을 지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고엥카 센터가 재가자가 이끄는 수행 단체라면, 마하보디협회는 승가에 의한 수행 단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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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4
붓다락키따 스님은 인도 불교의 재건이라는 원력을 가지고 참 많은 노력을 하고 계셨는데, 인도 현지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매우 드문 현자 중 한 분입니다.
그 스님 말씀의 핵심은 인도 불교는 인도의 특수한 사정과 연관해서 이해해야지 그렇지 않고 일반적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라이 라마도 좋고 또 암베드카르의 신 불교운동도 좋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정말 위엄 있게 인도 국민의 존경을 받는 가르침으로 다시 살아나려면, 미안하지만 이방인이나 천민에 의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렇게 그 스님의 속마음 그대로를 정직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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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5
그 스님이 달라이 라마와 친밀해서 달라이 라마를 초청해서 법회를 열기도 하였답니다. 그렇지만 달라이 라마나 암베드카르 추종자들은 인도 불교의 재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부정적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카스트 제도가 엄격히 남아있는 인도 사회에서 ‘티베트 난민들이 믿는 종교가 불교다.’ 해버리면, 대부분 인도인들에게는 오히려 장벽을 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랍니다. ‘난민들이 믿는 것을 난민도 아닌 내가 왜 믿어?’ 또 ‘그 불가촉천민들이 믿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어? 나도 불가촉천민이 되라고?’ 하는 풍토니까 불교를 믿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인도인들에게 불교가 이런 식으로 인식되면 될수록 불교 보급에 막대한 지장이 된다는 겁니다. 인도의 교육 받은 일반인들 또는 지도층인 소위 브라만들은 사실상 암베드카르 이후에 불교를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고 있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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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6
카스트 제도로 인하여 불교 재건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런 현상은 뿌네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뿌네대학교의 산스크리트·빠알리학과 교수들이 모두 바라문 출신이랍니다. 이제까지는 소위 뿌네 학파를 이룰 정도로 번성했는데 후계자가 없답니다. 뿌네에 가까운 뭄바이에 불가촉천민 출신인 암베드카르의 추종자들이 몰려 있고 거기에 절도 짓고 하니까, 다른 카스트에 속하는 그 주변의 인도인들이 도무지 빠알리어에도 불교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뿌네대학의 전통 깊은 이 학과에 이제 인도인 학생은 거의 없고 한국인과 소수의 일본인, 그리고 태국인 정도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답니다. 사용도 하지 않는 빠알리어, 산스크리트어 공부해 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는 가치관의 변화도 한 요인이겠지만, 설상가상으로 불교가 불가촉천민의 종교처럼 인식되어서 지도층인 바라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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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7
카스트와 불교 문제를 보는 붓다락키따 스님의 견해는 역시 인도 브라만 계급다운 통찰이었습니다. 그 스님은 인도의 소위 교육받은 지성인들에 의해서 불교가 수용되고 신앙될 때, 그때야 비로소 불교가 카스트 사회인 인도의 새로운 종교로서 위치를 점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도의 양가집 자제로 떳떳한 승가를 이루어 인도를 이끌어 나가도록 해야 올바른 불교공부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상류 카스트와 교육 많이 받은 지도층을 기반으로 해야 불교가 저력을 가지고 인도에서 뻗어나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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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8
그러기 위해서 그 스님이 할 일은 먼저 상류 카스트 신도를 확보하는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일은 빠알리 경을 그 지역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겁니다. 참으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적절한 통찰입니다. 그 지방의 주민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경이 확보되지 않고서 어떻게 불교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역경과 법당 짓는 원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붓다가야의 대탑 모양으로 법당을 짓고 있었어요. 그 스님이 젊을 때 성지참배를 하고는 대탑 모양의 절을 짓겠노라고 원력을 세웠다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렇게 크게 지을 힘은 없고 시멘트로 조그맣게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 원력만 가지고 북인도 출신 젊은 스님들 십여 명과 함께 외로운 노력을 하고 계십디다. 당시 그 스님은 74세의 고령이었는데 정력적으로 수행하면서 고군분투 포교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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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19
여러분도 붓다락키따 스님의 고민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인도 사회의 카스트 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벽이 두텁습니다. 부처님 당신도 카스트로서는 크샤트리야 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시지요. 제1계급인 바라문이 아니고 제2계급인 크샤트리야에 속합니다. 그러면서 상수제자는 바라문을 택합니다. 즉 사아리뿟따, 목갈라아나 이 두 분은 부처님과 같은 크샤트리야가 아니라 바라문입니다. 그 두 분이 첫 제자인 다섯 비구도 아니고 출가도 꼭 이른 편만은 아니었는데, 부처님이 왜 그 두 분을 상수제자로 했을까 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카스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인도에 가서 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합리적일 수 있을 것 같습디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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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20
부처님이 그러한 카스트를 어떻게든지 없애려고 참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불교는 카스트를 거부하는 것이 기본자세였습니다. 그러나 인도는 너무나 카스트적인 사회였습니다. 그 때문에 불교의 그 고매한 보편적 정신을 인도는 끝내 수용해내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불교가 카스트제도를 거부하는 자세 때문에 인도 사회에서 벽에 부딪혔고, 결국 인도 불교는 쇠락을 맞은 겁니다. 요컨대 불교는 카스트를 초월했기 때문에 보편성을 얻었다가 바로 그 카스트의 장벽 때문에 쇠퇴한 겁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실은 세력을 잃고 카스트 안에 용해되어 버린 셈입니다. 그것이 힌두교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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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21
고엥카도 보고 붓다락키따 스님도 만나봤기 때문에 두 사람을 아주 생생하게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두 분 연세는 70대로 비슷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붓다락키따 스님은 무척 겸허한 분이었습니다. 뛰어난 학자이지만, 조금도 표를 내는 법 없고, 그야말로 향상을 이루어가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엥카 센터에는 승가는 없고 일정한 규칙과 절차를 정해놓고 권위적인 모습만 있었습니다. 거기서 승가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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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22
그리고 인도에서 승복이란 게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다시 느꼈습니다. 승복은 제복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조직은 없습니다. 승가는 조직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스님들은 조직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복이 없습니다.
우리 스님들이 입는 이 승복은 본래 인도에서 시체를 쌌던 천이나 못쓰게 되어 버린 천으로 만들었고, 이미 용도가 끝나서 버려진 천을 주워 깨끗이 빨고 황토 물에 염색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자원 손실도 입히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철저하게 버려진 것을 입는 게 원래 승가의 승복입니다. 따라서 제복하고 성격이 다릅니다. ‘승복 값을 하는’ 스님들은 어떤 경우에도 권위를 탐하지 않습니다. 승가정신에 걸맞게 사는 스님들은 권력을 탐하지 않고 권위를 탐하지 않고, 따라서 어떠한 우상화나 신격화도 바라지 않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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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6.3.23
앞서 말한 붓다락키따 스님의 뜻은 참 고고하고 열정적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 봐서는 불교의 중흥을 기약하기에는 인도의 장벽은 너무나 두텁고, 인도의 대지는 너무나 넓다는 생각입니다. 인도 형편을 보면 붓다락키따 스님의 원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이분의 노력이 뻗어나가려면 적절한 시절 인연을 만나야 할 텐데요.
이렇게 인도의 불교 움직임은 네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 중에서 직접 만나 본 고엥카 처사와 붓다락키따 스님을 중심으로 인도 불교의 현실과 가능성을 짐작해 보았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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