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3
Paragraph 19.3.1
⚫ 불자의 편견과 선입견
불교에 친숙하고 스스로 불자라 여긴다 해서 과연 불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불교를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불교에 대해 이런저런 선입견이랄까 고정관념이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에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어서 ‘불자의 편견’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불교는 어떠한 편견도 갖지 말라는 그야말로 무편견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를 견지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불자가 불교 공부를 할 때에도 중도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바른 공부 길을 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여러분의 견해가 과연 바른지, 선입견은 아닌지 점검하고 확인하고 정리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중도 수행에 도움을 주는 바른 견해를 세울 것인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누구든 불교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데, 그 선입견을 어떻게 살피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강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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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2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나는 길은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른 마음챙김을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자기 정신을 딱 챙기는 것, 그것이 ‘바른 마음 챙김’입니다. 바른 마음챙김, 정념正念은 한 눈을 팔지 말고 내 마음을 챙겨서 염처念處에 집주集注하는 겁니다.1 〈자비경〉에 나오듯이 ‘생명을 바쳐서 위해危害로부터 외아들을 보호하듯’ 정신 차려 염처를 놓치지 말라는 겁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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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3
또한 불교에 대한 선입견의 문제는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수행 분상에서 바른 견해는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팔정도를 걷고 걸어 도달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흔히 어릴 때부터 지녀왔던 불교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나 단편적 내용을 가지고 ‘불교는 이런 거야’라고 생각을 굳혀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선입견을 잔뜩 가지고 무슨 수로 바른 견해를 닦을 수 있겠습니까? 그릇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데, 어떻게 새 물을 부을 수 있겠습니까. 미리 무장된 자기 견해가 굳어있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집착하듯 견해에 대해서도 집착합니다. 그걸 견집見執이라고 하지요.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불교를 대한다면, 그 불교 공부는 장애가 클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선입견을 극복하고 바른 견해를 닦을까요?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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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4
여러분이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깨닫더라도 그것을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나는 선입견 중독 환자다!’ 조금 자극적인 표현이지만 스스로 선입견 중독 환자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선입견에 젖어 있고, 엄청난 집착으로 중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선입견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중독자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나서야 어떻게 고치느냐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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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5
⚫ 선입견의 근본원인은 행이다
어떻게 하면 바른 견해를 갖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팔정도를 바르게 닦아 이생에서 부처님 법 만난 보람을 살릴 수 있을까?
어떤 사태나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그걸 불교에서는 법이라 합니다. 법은 의意에 대응합니다. 육처 중에 내육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이고 외육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입니다. 외육처는 내육처의 대경對境입니다. 눈은 색, 귀는 소리,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접촉, 의는 법에 대응합니다. 이때 여섯 번째 내육처가 의意mano, 여섯 번째 외육처가 법法dhamma입니다. 다시 말해 의意의 대경이 법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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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6
어떤 새로운 법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의를 잘 운전해서 그 법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풀어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컨대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것도 새로운 상황이고 법입니다. 이 법은 의意의 대상으로 포착된 것이지요. 그만큼 우리가 ‘어떻게 의를 구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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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7
불교에서 ‘지혜롭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 근원을 연기적으로 고찰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지혜에 연기법 이상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어떤 상황이든 나타났을 때는 그 상황을 법으로 파악하면서, 연기적 입장에서 그 법의 원인인 법을 찾고, 또 그것의 원인을 찾으면서 규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인을 찾아 들어가면 문제 자체에 대해 우격다짐으로 깨부수려고 들지는 않겠지요. 불교의 수행법은 원인을 찾아내서 그 원인을 무력화시켜 작용을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작용하는 루트를 차단해 버리는 겁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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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8
이제 나에게 선입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선입견은 어떻게 해서 생겼느냐?’를 고찰해 들어갑니다. ‘누구에게 들은 그 말이 그때 맘에 들었다, 반복해서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게 자리를 잡아 버렸다.’ 그런 식으로 선입견의 원인들이 있을 겁니다. 연기적 입장에서 그 원인을 규명해 들어가면 결국은 ‘모든 편견, 모든 선입견도 우리 마음이 차분하지 못하고 들떠있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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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9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들떠 있질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면, 어떠한 것도 쉽사리 마음에 드니, 안 드니 하지 않지요. 그렇게 되면 그 무엇도 내 마음에 들어와 자기 방을 구축해 들어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음성이 내 귀에 들린다든지 어떤 법이 내 뇌리를 칠 때, 그걸 함부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마음이 차분하지 않고 들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뜨지 않고 진정 차분하다면, 이 법이 맞는가 틀리는가,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를 깊이 숙고하게 됩니다. 내 기분에 맞는다고 해서 선뜻 받아들이진 않을 겁니다. 숙고하지 않고 부주의하게 선뜻 받아들였기 때문에 선입견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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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0
들떠 있는 이 마음을 일단 가라앉히는 작업을 하지 않고서는 이미 자리 잡은 선입견을 타파할 길이 없습니다. 혹여 용맹심을 발휘하고 온갖 사유를 동원해서 어떤 선입견을 타파해냈다 해도 들떠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 즉시로 또 다른 새로운 선입견이 자리를 잡고 맙니다. 들떠 있는 마음으로는 선입견 자체를 올바로 타파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어떤 선입견이든 ‘좋다, 나쁘다’라고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들떠 있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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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1
들뜸은 행行입니다. 들뜸은 도거掉擧로서 다섯 가지 장애2 중 하나입니다. 또 사람을 윤회에 묶어 놓는 열 가지 족쇄가 있는데, 그중 아홉 번째 족쇄가 도거입니다. 들뜸은 행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장애입니다. 끝까지 끊임없이 작용하는 가장 미세하고 끈질기고 깊숙한 행의 뿌리가 들뜸, 도거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들뜸, 도거야말로 행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사물과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만들어내는 들뜸의 에너지, 그게 행입니다. 이 행이 있는 한, 우리는 선입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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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2
행이 있으면 반드시 상想, 산냐saññā가 있게 되고, 세상만사를 상으로 보게 됩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행은 들뜸이기 때문에 세상을 신기루3로 볼 뿐,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 상으로 만들어진 불교 이해가 바로 불교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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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3
우리가 가진 불교에 대한 잡다한 지식이나 선입견을 검토하기 위해 지금부터 ‘불교는 이런 것이다, 이래야 한다, 수행자는 어떻다’라는 견해들을 살펴봅시다. 내가 잘못 받아들였거나, 부분을 전체로 이해했거나, 맥락을 살피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부분만 선택하여 나름대로 엮어서 그릇된 견해를 구축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합시다. 우리의 편견에 촉觸을 일으키지 말고, 대신 ‘지금·여기’서 일어나는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도록 방향 전환을 합니다. 요는 내육처內六處를 살펴서, 육처에 닿는 촉을 선택하자는 겁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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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4
여러분, 지금부터는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치부해 왔는데, 그건 기본적 오류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오류에 있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방향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선입견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표피적으로만 대결하면, 하나의 선입견을 버리는 데 성공한다 해도 즉각 다른 새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바른 견해, 정견에 발을 딛지 못한 채 밖에서 빙빙 돌다가 말 것입니다. 불교는 들뜸을 가라앉히고 고요함을 확고하게 다져서, 어떠한 대경에도 마음을 뺏기지 않을 만큼 자기 자신을 챙기도록 가르치는 체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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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5
들뜸을 가라앉힌 상태가 ‘고요, 적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요’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행을 가라앉힌 열반의 경지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으나, 굳이 말하자면 ‘고요, 적정’입니다. 일체의 행이 중단되고 그쳤으니까 고요한 것입니다. 그 열반·적정이 불교의 이상 목표입니다. 그 길은 결국은 팔정도입니다. 일단 ‘내가 들뜸 병 환자다’라고 인정하고 ‘내가 지금부터는 들뜨지 않고 고요의 방향으로 나아가겠다.’고 마음먹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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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6
‘아하, 내가 들뜨는구나!’ 하고 살펴 들뜸을 가라앉히며 고요를 이렇게 실천해가면 열반을 향해 최초의 씨앗을 뿌리는 셈이 됩니다. 그 씨앗이 자라도록 거듭하여 바른말을 하고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를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챙길 때는 어느 정도 실천이 되는데, 그 다음 행동을 할 때는 잊어버리기 일쑤이지요. 고요에 대한 생각은 간절한데 잘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될까 숙고하면서 바른 노력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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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7
들뜸을 가라앉히고 고요로 가는 길은 오로지 바른 마음챙김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챙기지 못하고 들떠 ‘지금·여기’를 놓치고 이리저리 방황할 때 불안과 초조가 생기는 겁니다. 바른 마음챙김에는 들뜸에서 오는 어떤 스트레스도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요컨대 마음 챙기는 노력을 일상생활에서 간단없이 해낼 수만 있다면, 행을 가라앉히고 향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반을 이미 마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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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8
⚫ 불법의 빛에 사이클 맞추기
여러분, 고苦는 우연히 재수 없어서 만나는 게 아닙니다. 무명과 행이 지배하는 한, 이 사바세계에서 고苦는 구조적인 것이어서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행을 가라앉히는 길 말고는 고를 해결할 방법이 달리 없습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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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19
행을 가라앉히려면 연기법에 따라 무명을 없애야 합니다. 무명을 걷어내려면 지혜의 빛이 필요한데, 무명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는 부처님 지혜의 불빛을 빌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지혜의 빛을 아무리 찬란하게 비추어 주셔도 우리 눈이 그 빛과 사이클이 안 맞으면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 그대로입니다. 사이클 차이로 지혜의 빛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겁니다. 사이클을 맞추는 노력이 행을 가라앉혀 나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들떠 있으니까 부처님의 고요한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면 부처님의 빛도, 정법의 빛도, 선지식의 빛도 우리 눈에 포착됩니다. 그리되면 밝고 훤해집니다.
우리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부처님 지혜의 빛과 정법의 빛이 없어서입니까? 빛은 우주에 충만합니다. 아무리 빛이 충만하면 뭐 합니까. 사이클을 못 맞추어서 우리 안테나에 안 잡히는 걸 어찌합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안테나가 그 빛을 탁 잡아서 우리 자신의 빛으로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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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20
부처님 빛과 사이클을 맞추는 비결이 결국 ‘고요’입니다. 그 고요를 지금부터 명상 주제로 삼아보십시오. 잠시나마 가만히 있도록 스스로 자신을 길들여 봅시다. 길이 들어서 마음의 헐떡거림을 스스로 가눌 수 있다면 고요해집니다. 가령 듣기 싫은 말 들을 때 화를 벌컥 내는 습관을 바꾸려면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지금·여기’서 알아차리도록 애쓰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저 사람 말이 옳다, 그르다’ 시비하던 버릇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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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21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에 휩쓸려 버려서 옳으니 그르니 따지고, 자기 마음에 들면 좋고 못마땅하면 성내는 걸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우리는 항상 남의 말에 시비를 가리고, 경중을 가리고, 고하 귀천을 가리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거기에 대해 보이는 자기의 반응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면 상대도 그럴 수 있지요. 반면 바른 마음챙김의 분상에서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말에 사로잡혀서 그걸 옳으니 그르니 저울에 다는 대신, 그 순간에 ‘내가 지금 어떤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구나’ 하고 자기 점검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바른 마음챙김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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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graph 19.3.22
정리하자면 우리가 바른 마음챙김을 할 때 비로소 행이 가라앉고 고요해집니다. 여러분, ‘지금·여기’에서 눈에 들어오는 모습, 귀로 들어오는 소리, 코로 들어오는 냄새, 혀로 들어오는 맛, 몸에 닿는 촉감에 대해 일어나는 반응을 살피는 노력을 부단히 해낸다면, 해탈·열반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은 ‘일주일만 간단없이 바른 마음챙김, 정념을 할 수 있다면 아라한이 되거나 적어도 불환과는 이룰 것’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생들이 일주일 간단없이 바른 마음챙김을 지속한다는 게 그토록 어려워서 속절없이 사바의 고를 겪으면서 고해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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